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(문단 편집) === 나치당원 행적 === 잉크바르트는 오스트마르크 주로 격하된 오스트리아의 국가 주지사 겸 총리로 취임해 1939년 4월 30일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. 그리고 국가 주지사로 임명됨과 동시에 국가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. 한낱 비공식 자문 변호사에서 나치당의 거물급 인사로 자리잡은 것이다. [[오스트리아 병합|독일과의 병합]] 후, 잉크바르트는 바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색출에 나섰다. 유대계열 재벌이던 [[로트실트 가문]] 빈 분가의 당주이던 루트비히 나타니엘 폰 로트실트 [[남작]]도 체포되었다. 그리고 유태계 재벌인 로트실트 남작과 거래를 한다. 로트실트 남작은 거액의 재산을 바치는 조건[* 추정치로 현가 3조 5천억원이다.]으로 풀려나 [[미국]]으로 망명하여 그 후론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지 않았다. 이 때문에 빈 로트실트 가문은 가계가 단절되고 말았다. 1938년 3월 15일에 힘러로부터 명예 [[슈츠슈타펠|SS]][[중장]]의 지위를 얻은 잉크바르트는 1941년 4월 20일엔 SS대장으로 진급했다.[* 자신과 같이 독서와 체스를 좋아하는 힘러와는 친한 사이였으며 생일에 서로에게 책을 선물할 정도였다.] 국가 주지사 퇴임 후 잉크바르트는 1939년 5월부터 히틀러 내각에서 무임소장관으로 입각했다.[* 국무위원이기는 하나 행정 부처의 장은 아니다. 하지만 나치의 행정 변천과 권력투쟁의 과정을 따져보면 입각 자체가 히틀러의 믿을 수 있는 측근이 됨과 동시에 최고의 논공행상이라고 볼 수 있다.] ||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420px-Bundesarchiv_Bild_119-5243%2C_Wien%2C_Arthur_Sey%C3%9F-Inquart%2C_Adolf_Hitler.jpg|width=100%]]|| || 히틀러와 함께한 잉크바르트(히틀러의 왼쪽 - 사진 속에서 오른팔 방향). 히틀러의 왼쪽은 [[마르틴 보어만]], [[에른스트 칼텐브루너]] 오른쪽은 [[하인리히 힘러]], [[카를 볼프]] 그리고 맨 오른쪽은 [[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]] 친위대 중장. || 여기까지만 본다면 아마 인지도가 별로 없는 나치 고관으로 끝났을 것이고 굳이 사형까지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. 그리고 [[안슐루스]] 자체도 과정이 편법적이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고 여겨진다. 독일민족의 단일국가 건설이라는 명분도 있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모두에서 병합 찬성률은 굉장히 높았다. [[신성 로마 제국]]을 잇는 독일민족의 단일국가 건설이라는 꿈과 강대국인 독일인으로 사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